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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07 이대진 복귀전의 향수를 다시 생각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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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2007년을 마무리하며, 가장 인상깊은 야구경기로 4월 7일. 그날의 경기를 뽑았었다. 같은 기아빠인 친구와 함께 갔던 그 경기에는, '그'가 있었다.자리에앉아 그가 마운드에 올라서는것을 보았을때, 내등뒤에서는 노오란 무언가가 날아갔었고, 난 그것들을 찍어 서태지의 Take Five를 배경음악으로깔고 편집해서 기아타이거즈팬사이트에 올리고 한도없이 되뇌였다. '그' 가 돌아왔구나.. 

'그'는 배가부른 한국시리즈 9승을한 해태타이거즈에서 마지막까지 혼신의힘을 다해 던졌고, 그로인해 마지막승리를 거두고, 결국 팀을위해 희생한 그는 투수로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5번의 실패끝에 올해 재기에 성공했고, 기아타이거즈가 우승한 2009년.. 한창 잘나가던 8월. 기아의 20승4패중, 3패는'그'가 한것이었다.

혹자는 물을것이다. "이제 전성기의 150대의 돌직구도, 변화구도, 체력도 안되는사람을 왜 선발로 쓰나요?" 그러나 그의 경기를 살펴보면, 다음 2~3위팀과의 결전을위해 36세의 은퇴하고도 남을나이로 연이어 등판했고, 자신의 몸상태가 안좋은것을 알고있었고, 코칭스태프는 그런 몸상태로 팀을위해 등판하는 자신을 말렸지만.. '그'는 오랜시간을 버텨 다음 3연전에 쓸 투수를 아끼게 해주었다.. (보통 선발투수는 5~7일에 한번정도 등판합니다.) 그리고.. 그날. 11연승이 '그'로인해 깨지던 그날. 그날의 '그'로 인해 기아타이거즈는 1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게된다.
 
그가 '한국시리즈' 마운드를 밟던날.. 해태타이거즈의 팬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너무도 감격적인그날. 아무도 '그'가 그 마운드를 밟는데 이렇게 오랜시간이 걸릴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것이고, 10년전. '그'가 투수로서 사형선고를 받은날부터 5번의 재기실패를 겪을때마다.. 사람들은 그가 이 마운드를 밟을거라는 생각을 하나..둘.. 버려가기 시작했다.

또 혹자는 말하겠지. "올해 성적이 그따위인 투수를 왜 한국시리즈 멤버에 포함시켜요? 겨우 상징적인 의미때문에 그런다는게 말이되요?" (야구에서는 한번에 1군에 보유할 수 있는 엔트리멤버가 한정되어있고, 이 멤버 한둘이 바뀐다는것은 엄청난 전략적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도중에서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를 겨우 성적으로 바라봐서는 안된다. 그는, 팀을위해 희생한사람이고, 이제 편한경기만 골라서해도될 36세의 나이로. 그것도, 7년여간의 재활기간을 거친그가.. 뭐같은 구단과, 감독으로인해.. 그리고, 너무 강직하고 희생적인 본인으로인해 본인의 몸을 희생해가며 이런 경기들을 펼쳐나간것이다..
 
 

'그'는 '이대진'이다. 이대진은 90년대. 이종범과 함께 해태타이거즈를 이끌어나갈 차세대주자로 주목받았고, 또한 그러하였다. 해태타이거즈는 악으로 깡으로 뭉치어 군기와 기합이 가장세면서도, 가장 우승을 많이했으면서도.. 가장 선수대접이 안좋으면서도.. 3S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생겨난후, 그 계기가 어찌됐던간에 전라도사람들은 야구에 열광했다. 여러가지방면에서 소외받던 전라도에서 승승장구하는것은 오로지 해태타이거즈뿐이었고, 광주제일고를 비롯하여 여러 고교에서는 고교야구가 생겨나고, 지금도 그 고교들에서는 한국의 수준급 선수들을 계속 공급하고있다.

이대진은.. 선동렬보다 강력한 직구를 가지고있다고 평가되었고.. 1선발 (각팀에서 가장 잘던지는 선발투수. 한번이라도 먼저던져야 한경기라도 더하니, 한경기라도 더하는사람을 앞에 세워야함.) 끼리의 맞대결에서 승리하며.. 고작 6년동안 76승과 3번의 한국시리즈우승이라는 말도안되는 경력을 지녔다.

98년. 해태의 부도. 선동렬도.. 이종범도 떠난 그때.. 임창용도. 이강철도. 조계현도 떠나갔다. 젊은나이에 거머쥔 한국 최고의 투수는, 한국에서 가장 대우가 처절하다는 (그저 팀에 있기만해도 그 가치가있는 이강철을, 10년여의 암흑기에 홀로남아있던 장성호와 김종국을, 강철민을, 미국에서 갓건너온 최희섭을 구단은 단 1년의 성적으로 판단했고.. 다른팀에서였다면 더 좋은 훈련시스템과 격려.. 전담 코치를 붙여줬을 그들은, 기아구단에의해 은퇴하고.. 2군으로 떨어지고.. 연봉을 대폭삭감당하고, 선수로서의 자존심인 FA자격까지 잃었다..) 타이거즈에 남았다.

이대진은 타이거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는 99년에 부상을당했고, 팀을위해 어쩔 수 없이 00년도에 마운드에 올랐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는 좋지않은 몸상태에 팀을위해 헌신했고, 8승을거두고 그자리에서 투수로서 사형선고를받았다. 어깨를 쓸 수 없다... 김성한감독은 그에게 타자를권유했지만.. 그 벽은높았다... 그리고, 투수로서의 꿈을 버리지못하고 다시 마운드에 오르지만.. 실패한다.. 후배 김상진이 죽은후, 그의 등번호를달고 마운드에올랐으나.. 그는 후배의 번호를 더럽히고싶지 않다는말을 남기고.. 추락했다..

그리고 07년. 그는 내앞에서 또 마운드에 올랐다. 괜찮은데.. 그몸 이끌고 또 올라오지 않아도 괜찮은데.. 정말 괜찮았다. 이대진이 어떤역할으로서던 타이거즈에 남아있기만 한다면.. 그를 볼 수 만있다면 뭐든 괜찮았다.

노란 비행기.. 노란비행기를 던지며.. 10연속탈삼진.. 탈삼진163개.. 최다승.. 골든글러브.. 이제는 힘들지만.. 그는 7여년의 재활훈련끝에.. 상상해봐라. 당신은 자신이 하고싶은일을 더이상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을때, 다시하기위해 7년동안 노력할 수 있는가?구단과 팬들을위해 7년을 쏟을 수 있는가?

그는 결국 성공했다. 2007년. 그는 컴백경기에서 6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었고, 그경기에서 최하위이던 기아타선은 9점을뽑아내고, 8개구단 최악이던 중간계투도 2실점으로 마무리하며 9-2승리를 거두게되었다. 그리고, 대진성님.......... 이대진은 2007년.. 7승을거두며 우리아부지의 기다림에 보답해주었다.

그리고 올해 내생일. 난 그날도 이리저리 쏘다니며 재미있게 놀고.. 집에들어와서 푹잤었다. 다음날, 학교에 다녀와서 어느때처럼 신문보고 밥도먹고 인터넷을키고 네이버로 야구 하이라이트를 봤었다.

...그날은 이대진이 100승을 기록한날이었다.

이대진이 부상을 입지않았더라면, 송진우보다 더 많은 승수를 올렸을것이다.. 하지만, 그날 이대진의 100승은 나에게 송진우가 2100승을 거둔다고해도 그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 이대진은.. 무실점으로 중간계투로서 그의 역할을 다하였다.. 마지막. 09년 프로야구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최종전경기를 관람하던 나. 그리고, 내 주변의 모든관객들은.. 나지완의 홈런을 끝으로 타이거즈의 정말 '오랜만의' 우승에 모두 박수를 쳤고, 나지완보다, 김상현보다.. 그들은 이종범과 이대진에게 그 공을 넘기려하며.. 장성호를 부르며..

그리고, 조뱀(조범현감독)을 욕하던이도.. 이대진의 재활기간중 월급이라도 타며 생계걱정없이 재활에 힘쓸수 있게.. 코칭스태프도 붙여주고... 한국시리즈에 올려준것에대해.. 이대진의 경기에서 항상 그를 믿어주던 조범현이라는건 아무도 부정하지 못했을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야구장에갔던. 외할머니손을잡고 광주 무등구장에 갔던 그 경기에도. 이대진과 노란물결이 있었다.
아련한 기억속의 그 노란것이 무엇인지 나는 기억하질 못하겠다.
 
하지만, 이대진의 복귀경기에서 날아가던 그 비행기.. 종이학 기타등등을보며.. 그날의 그 노란것들도 비행기였을까? 하는생각을 해본다. (노란 공기 들어간 그 응원용막대기? 였던거같기도하고... 으음.. 너무 어릴때일이라 기억이 안나지만..)
 

이대진이 복귀하던 그날의 노란비행기. 난 그날을 절대 잊지못한다. 그리고, 난 그날만큼 멋있던 노란비행기를 또 보게된다. 2009년 8월 30일. 서태지의 8집을 마무리하던 그 공연에서, 팬들은 그를위해 노란비행기를 접어 날렸다.

서태지가 9집을 들고와도 노란비행기를 바라보며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을 수 있을까?
이대진이 내년에도 노란비행기 세례를맞으며 마운드에 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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