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

ThePalace/Book 2012.07.12 14:07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

경쟁을 인정한 서구 이데올로기는 17세기 이후 동양을 앞질렀고, 그 경쟁은 무한한 파괴를 낳았습니다. 그들 서구문명이 지구를 뒤덮은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환경파괴. 그리고 환경보호의 필요성을 동시에 얻었습니다.

탄소배출이나 오수방출 등을 금지하는 등의 제도나 법률 등에서 인류의 발전과정이 나타났으며, 그것은 교토의정서 등에서 보여지듯 범지구적인 입장에서 해석되고, 또한 실천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성의 성숙은 한 사람의 뛰어난 이성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있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종국에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기에 저는 이러한 진행들을 보며 저 또한 그 이성의 발전과 우리가 살아갈 환경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위해 노력해야함을 생각하며, 우리가 환경파괴로서 얻은 환경보호의 필요성을 더욱 더 강조해야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이성.

즉 몇몇 비정부기구 혹은 정부에 의해 기후정의 운동이 촉구될 시기는 이미 지났습니다. 환경파괴는 이미 특정한 정부나 지역을 초월해서 일어나고 있고, 그것은 범지구적 계몽과 실천으로 인류 전체 이성의 발전을 촉구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발전 과정인 몇몇 비정부기구 혹은 정부에 의한 규제 등이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전 매우 바람직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허나, 자유로운 세상은 법 대신 도덕이 실천되는 사회일 것입니다. 자신의 안전과 권리. 이익활동을 보장받는 이 자유로운 사회에서 범지구적인, 모두를 위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이득에 묻혀 쉽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오버마케팅. 또 다른 욕구와 소비를 부르는 소비의 충족은 이미 지구의 자정능력을 넘어서고 있으며, 아무리 지구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기술도 종국에는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을 감안하였을 때 환경보호에는 신중함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 예로 석탄이나 원자력은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이고 문제없는 기술이었으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석탄이 방출하는 탄소나 원자력이 남기는 폐기물 등을 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부의 규제로 끝나버린 이성 발전과정에서 그것을 금전화하고,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움직이게 합니다. 그는 결국 당장 충분히 검증받지 못한 아니, 새로운 문제점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새로운 문제점을 일으키게 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공기는 평등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더럽히거나 정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평등하지 못합니다.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를 이용하는 인구가 전 지구의 몇 퍼센트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은 지구의 모든 생물이 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은 '나'와 '사회' 즉 국가가 동시에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범지구적인 이성의 성숙에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것의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지만 직계 혹은 방계의 문제점 발생지가 또 생길 경우 이것은 훨씬 더 복잡해집니다. 사람들이 너무도 오만하게 실시한 모든 기술들. 유해병원균을 내재한 생물들의 터전을 빼앗음으로 생기는 새로운 질병들과, 약에 찌들어 생겨버린 지나친 약에 대한 내성들은 한낱 화전민, 벌목업자와 같은 개인이나 약사와 같은 이익집단 등이 범지구적인 문제점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나아간 방향으로의 성장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변화는 과학적이지만, 진보는 윤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점의 원초적인 문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그것이 몰고 올 사회적 파장을 생각하지 않는 자들의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서 덜 성숙된 이성과 그 이성에 맡겨진 너무도 큰 권한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무조건적인 절약이나 보존이 근본적인 대책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문제의 근본을 배제하고 당장의 해결책만을 찾는 것입니다. 사회는 이미 지구적으로 지나치게 얽혀있습니다. 도덕 감정론에 찬사를 보내며 스와데시를 붕괴시킨 서구사회는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하였고, 그로 인하여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등과 같이 몇몇 국가나 단체 등의 정체는 전 세계에 치명적입니다. 그것은 전기자동차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자동차산업의 부양력을 이유로 쉽사리 전기자동차를 과감히 실용화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지요. 환경에 대한 문제점을 타개하는 것에 있어 강대국들과 약소국들의 입장 차이는 두드러집니다. 강대국들은 그들의 논리와 기준으로 국제적인 협력과 규제를 이룩하려하고, 약소국들은 형평성과 생존성을 이유로 그것에 반대합니다.

한쪽에서 아무리 나무를 심어도, 한쪽에선 나무가 베어집니다. 이것은 개개인이, 각 집단이 이익을 취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이따금 이러한 생각도 해봅니다. 개도국들이 지금 겪는 발전과정은 이미 선진국들이 같은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결국 이 일은 어느 쪽도 열린 공동체 주의를 가지지 못 하였기에 나타난 것 일겁니다. 전 이러한 국제협력에서 한국사회는 그 국가의 물리적인 한계를 드러내기보다 한국의 정신을 전해주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한국의 선비정신이나 일본의 무사정신, 혹은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각기 지배층의 도덕적 의무를 칭하면서, 또한 각 국민들의 정신에도 포함됩니다. 전 앞서 말했듯이 이 모든 문제는 눈에 보이는 수치 따위 보다 그 내면적인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한국의 고유한 사상인 사사로운 이해득실을 떠나 공동의 가치관을 중히 여기는 마음을 모두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가 열심히 공장 늘리면서 아마존에 있는 나무를 못 베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전 그것보다 공장을 짓는 만큼 공장 옆에 나무를 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강대국들이 어떠한 기준을 잡더라도 그것은 공평하지 못합니다. 어쨌거나 그것의 기준들은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것이고, 모두들 그 기준에만 맞추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러한 각자의 이득만을 생각하는 사회에서 지구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신기술이 아닌 동양의. 특히 한국의 선비사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변화는 과학적이지만 진보는 윤리적 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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